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국 요리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전쟁]]과 [[배급]]제의 악영향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영국의 배급 제도)] [[파일:One-persons-allowance-rations-10021951-PA-5178908.jpg]] ▲ 1951년 당시 한 사람에게 할당된 일주일 분 음식의 종류. [[달걀]], [[베이컨]], [[버터]], [[치즈]], [[고기]]와 [[통조림]] 고기, 조리용 [[지방]], [[홍차]], [[마가린]], [[설탕]]으로 구성된다. 본래 영국은 독일이나 네덜란드처럼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들로 가정에서 만든 소박한 전통 요리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에 기반한 화려한 식문화를 뽐내던 [[남유럽]] 국가[* 특히 미식으로 유명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튀르키예]]. 영국과 정치적으로 [[이웃나라/안 좋은 사이|갈등 관계]]에 놓여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은 영국 요리를 특히 더 비웃었다. 현대 영국 요리 밈의 근원도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에게서 기원한다.]들은 당시에도 이를 비웃었지만, 당시의 영국 요리는 그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맛이 심심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 전통을 이어받은 육류 요리[* [[로스트 디너]], [[스테이크]], [[비프 웰링턴]]], 다과류 및 [[빵|제빵]]류[* [[애프터눈 티]], [[쇼트브레드 쿠키|쇼트브레드 비스킷]], [[케이크]], [[식빵]] 등], [[피시 앤드 칩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와 같은 요리들은 현대에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문화는 [[산업혁명]]을 거치며 대도시에서부터 점차 퇴보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시작된 [[배급]]제로 인해 치명타를 맞는다. 전쟁 시작 직후 나치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상선들을 마구 격침시키며 섬나라인 영국을 말려 죽이려 했다. 그리고 영국은 프랑스가 망한 1940년 5월부터 [[독소전쟁]]이 터지는 이듬해 6월까지 독일의 공격을 홀로 받아내야 했다. 경제는 군수물자 생산을 우선시하는 [[총력전]] 체계로 개편되며 정부의 계획적인 통제를 받기 시작했고 식재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본격적인 지원을 받게 된 것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942년부터였으니, 그 이전까지 약 2년간 영국인들은 아주 팍팍한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추축국 세력이 약화되고 연합군이 공세로 전환한 1943년부터는 사정이 꽤나 호전되었으나, 영국에서는 세계대전이 초래한 피폐한 경제로 인해 전쟁이 끝나고도 오랜 세월 배급제가 유지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부터 [[6.25 전쟁]]이 끝나고 나서인 [[1954년]]까지, 자그마치 '''약 15년간이나''' 실시되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당시에는 [[국가행정조직/영국|영국 정부]]가 나눠주는 몇 가지 되지 않는 필수적인 생필품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수적인 식재료들은 거의 식탁에서 사라졌다. 일부를 제외한 필수적인 식자재들은 배급 쿠폰을 제시하고 정해진 양만을 받아갈 수 있었다. 영국 국민들이 기본적으로 배급받던 일주일치 식료품은 다음과 같다.[[https://the1940sexperiment.com/rationing-diet-sheets/|#]] * [[베이컨]]과 [[햄]] 4온스[* 약 120g.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슬라이스햄 기준으로 4장 정도 분량이다.] * 약 1파운드 가량의 [[고기]][* 약 450g. 시판되는 간 고기 한 팩 정도 양이다.] * [[버터]] 2온스[* 약 60g. 시판 버터 바의 절반 정도 양이다.] * [[치즈]] 2온스 * [[마가린]] 4온스 * [[쇼트닝|요리용 지방]] 4온스 * [[우유]] 3파인트[* 여섯 컵 정도. 1파인트짜리 병 하나가 약 두 컵 정도 양이다.] * [[설탕]] 8온스 * [[보존식품]] 1파운드(2달마다 제공) * [[홍차]] 2온스 * [[달걀]] 1개 * [[사탕]]류 12온스(4주마다 제공) 생산량이 원체 많던 [[감자]], 바다에서 잡을 수 있던 [[생선]], 그리고 정부에서 제공한 거칠고 맛없는 [[빵|통밀빵]]인 '국민빵(National Loaf)' 정도만이 배급에서 제외된 품목이었다. 이 중 국민빵은 1942년 도입되어 1956년까지 생산되었는데, 전쟁 당시 제조가 허가된 유일한 식사용 빵이었다. 밀가루 낭비를 막기 위해 도정 정도가 낮은 85% 추출 [[밀가루]]와 [[감자]] 전분, 그리고 [[귀리]]나 [[보리]], [[호밀]] 가루 등을 섞어 만들었다. [[설탕]]은 아예 넣지 않았던 대신 [[소금]] 함량은 좀 더 높았는데, 이는 전시에 귀해진 설탕을 아끼고 좀 더 보존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심지어는 만들고 나서 하루 묵혔다가 팔도록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나마 식감이 괜찮은 갓 만든 빵만 구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영국은 독일처럼 빵에 [[톱밥]]을 섞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가장 기본적인 식단이라 할 수 있는 빵마저 배급으로 제공한다면 국민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것이라고 우려했기에, 최대한 빵만큼은 넉넉하게 제공하고자 했다. 국민빵은 통곡물에 도정 정도도 낮았기 때문에 건강에는 좋았지만, 워낙 거칠어 소화하기도 힘든 데다 맛도 없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국민빵에 "[[히틀러]]의 비밀 무기"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심지어는 오늘날 한국군에서 도는 [[별사탕]] 관련 오해처럼, 정부가 국민빵에 [[최음제]]를 넣었을 거라는 악소문까지 돌곤 했다. 도정이 덜 된 [[밀가루]] 때문에 볼 수 있던 씨눈을 영국인들이 최음제로 오해한 것이었다.[[https://www.cooksinfo.com/national-loaf|#]] 또다른 배급 예외 대상이었던 [[생선]]은, 당시 가장 위험한 직군 중 하나였던 [[어부]]들의 생계 유지를 위한 배려 차원에서 제외되었다. 어부들은 [[독일 공군]]의 전투기나 [[독일 해군]]의 함선들, 또는 그들이 깔아댄 [[기뢰]]에 접촉할 일이 많았기에, 바다에 나가서 조업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목숨을 걸고 전쟁터의 최전선을 뒤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어선단은 기뢰를 제거하기 위한 소해 작전에도 많이들 동원[* 쌍끌이 어선이나 일반 트롤어선의 [[저인망]]에 칼날을 달아, 바다 바닥을 끌고 다니며 설치식 기뢰의 와이어를 끊었다. 떠오른 기뢰는 전문 소해함이 처리했다.]되었기에 위험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때문에 정부는 생선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만은 제어했지만, 어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잡아온 생선들을 제 값 주고 파는 것까지 제지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잡혀온 생선들 중 [[대구(어류)|대구]] 같은 것들은 또다른 배급 예외 품목이었던 [[감자]]와 함께 조합되어 [[피시 앤드 칩스]]로 만들어졌다. 피시 앤드 칩스가 영국인들의 국민 요리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https://www.forces.net/heritage/history/did-fish-and-chips-help-us-win-both-world-wars|#]] 배급되지 않는 품목들은 같이 도입된 포인트 제도로 구할 수 있었다. 모든 국민들은 매 4주마다 16포인트를 지급받았고, 포인트를 차감하여 기타 [[통조림]]이나 건조 [[과일]] 등의 품목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 포인트의 증감은 한 사람당 하나씩 주어진 배급 수첩(Ration book)에 기입되었다. 그러나 전 유럽이 독일의 손에 떨어지고 항로는 [[유보트|독일 잠수함]]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으니, 많은 물자들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못했다. 가령 [[치즈]]의 경우, 전쟁 전 영국은 70% 이상을 [[서유럽]]에서 수입했으나 이 국가들이 전부 나치 독일령이 되면서 영국인들은 치즈를 먹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대신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프리카]]에서 수입하게 되면서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남유럽에서 수입해오던 [[양파]]나 [[토마토]] 역시 식탁에서 거의 사라졌다. 한편 신선한 생[[과일]]과 생[[채소]]의 경우, 보관과 유통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승리를 위해 땅을 파자(Dig for Victory')는 일종의 [[자급자족]]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들이 직접 재배할 것을 주문했다. 이로써 주택과 별장의 뒤뜰이나 도시의 공원, 공터들은 [[밭]]으로 개간되었다. [[윈저 왕조|영국 왕실]] 일원 역시 자신들의 영지인 [[윈저 성]]과 [[밸모럴 성]]의 정원에 밭을 일구어 직접 채소를 길러다 먹었다.[[https://www.rct.uk/resources/activity-challenge-wartime-windsor|#]]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선 기를 수 없던 열대 과일 같은 경우는 여전히 위험한 바다를 건너서 가져와야 했으니 정말로 보기 힘들었다. 진짜 [[바나나]] 대신 [[설탕당근]]을 갈아다 바나나 모양으로 반죽하고 바나나 향을 첨가하여 바나나랍시고 먹어야 하는 식이었다.[[https://the1940sexperiment.com/2016/02/28/mock-banana-recipe-no-148/|#]] [[식당]]들은 그대로 영업했지만 역시 물자 부족에 크게 영향을 받아 부재료가 이것저것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마저도 1명이 한번에 주문할 수 있는 양은 3접시로 한정되었다. 특히 고기가 들어간 메뉴는 메인 메뉴로 분류되어 1접시 이상 주문할 수 없었다. 추가적으로 영국 식품부는 [[교회]]나 학교 등을 [[징발]]해다 공공식당[* '영국 식당'(브리티시 레스토랑 British Restaurant)이라 한다. 일반명사 같지만 고유명사다.]을 열어 배급표를 잃어버렸거나 폭격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당시 영국 전역의 공공식당 점포 수는 2,160개였는데 이는 오늘날 영국에 있는 [[맥도날드/타국#영국|맥도날드]] 점포 수(약 1400개)보다도 50%가량 더 많은 숫자였다. [[파일:British-Restaurant-in-Portsmouth_C-News_Portsmouth-Museums-2.jpg]] ▲ 대전 당시 [[포츠머스]]의 "공공식당(영국 식당)" 내부의 모습. 간이 막사를 식당으로 만들었다. 공공식당에서는 배급 쿠폰이나 포인트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고 가격[* 최대 9페니의 값을 치르면 됐다. 사설식당들은 영국 정부가 가격을 강하게 통제했으나 기본적으로 이익을 위해 운영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최대 5실링까지 가격을 매기는 것을 허가했다.]도 저렴했기 때문에 많은 영국인들이 식사를 했다. 하지만 제공하는 요리들은 대부분 아주 단순한 구성을 자랑했다. '고기와 채소 2개(Meat and two veg)' 또는 '생선과 채소 2개(Fish and two veg), [[영국 요리/종류 #s-2.7|푸딩]][* 미국식 [[젤리]] 푸딩이 아니라 영국식 푸딩을 의미한다. 이건 오히려 식사에 가깝다.]과 [[감자|구운 감자]], [[스튜]], 그리고 [[홍차]]와 [[커피]] 등의 기호품 정도 뿐이었다. [[https://www.whodoyouthinkyouaremagazine.com/feature/british-restaurants-second-world-war/|#]] 물론 기본적으로 제공하던 메뉴가 그랬다는 것이고, [[로스트 디너]]나 커스터드 크림 올린 구스베리 타르트 등의 다른 요리들도 종종 '오늘의 메뉴(Today's Menu)'로 올라왔다. 그리고 영국 식품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국민들이 좀 더 다양한 요리들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끔 창의력을 쥐어짜내어 다수의 요리 레시피를 각 가정에 배포했다.[[https://the1940sexperiment.com/100-wartime-recipes/|#]] [youtube(1kjbNbvL5iw)] 가령 위 영상은 1940년 영국 식품부가 제작하여 상영한 [[청어]]구이 조리 및 취식 방법 교육영상이다. 오늘날 TV의 요리 프로그램과 요리 유튜버들이 올리는 영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어떻게 청어를 손질하고 어떻게 구워야 하는지, 또 먹을 때 [[가시]]를 어떻게 발라야 하는지까지 세세하게 알려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늘과 내장을 제거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가시를 발라낸 뒤, 소금과 파슬리, 그리고 후추로 양념하여 오븐에 구워낸다. 진미로 취급받는 [[알집]]이나 [[이리]]는 따로 잠시 빼 두었다가 양념하기 직전에 청어에 도로 집어넣어 함께 조리한다.] [[파일:오슬로식 아침식사.jpg]] ▲ 오슬로식 아침식사. 또는 좀 더 나은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채소만 잔뜩 채워넣은 [[파이]]인 울턴 파이(Woolton Pie)[* 2차 대전 당시 [[런던]]의 유서 깊은 호텔인 사보이(Savoy) 호텔에서 만들었다. 이름은 당시 영국 식품부 장관이던 울턴 [[백작]] 프레더릭 마커스 경(Frederick Marquis)에서 따왔다. 영국 식품부에서 배포한 공식적인 레시피에 따르면 [[감자]], [[콜리플라워]], [[루타바가]], [[당근]], 그리고 [[양파]]를 푹 익힌 후 파이 반죽에 넣어 구워낸다. 먹을 때는 [[그레이비 소스]]와 함께 먹는다.[[https://www.bromleyhistoricaltimes.co.uk/lord-woolton-pie-official-recipe/|#]] 울턴 경 본인도 공공식당 시찰 도중 자신의 이름을 딴 이 파이를 먹었던 적이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전시 요리 중 하나로 손꼽히며,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영국인들의 식탁에서 퇴출되었다.] 등의 메뉴를 만들거나 [[채소]] [[수프]] 또는 [[오슬로]]식 아침식사(Oslo Breakfast)[* Oslofrokosten. [[노르웨이]]에서 처음 만들어진 대륙식 [[아침식사]]의 일종이다. [[버터]]나 [[마가린]] 바른 [[호밀빵]] 몇 조각과 [[우유]] 작은 병 하나, [[치즈]] 몇 조각, [[사과]]나 [[오렌지]] 등의 [[과일]] 몇 알이나 생[[당근]] 등의 채소로 구성된다. 또는 삶은 [[채소]]를 곁들이기도 하며, 가을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식사 후에 먹을 [[대구]] [[간유]]로 만든 영양 보충제를 같이 주기도 했다.][* 오슬로식 아침식사는 저렴하고 간편한데다 단촐하지만, 영양학적으로는 뭣 하나 빠지는 것 없이 균형잡힌 영양소를 공급한다. 때문에 20세기 초 여러 나라들에서 무료 단체 배식, 특히 아이들을 위한 [[급식]]으로 도입했다. 원래 유럽의 아이들은 3분의 2가 저체중과 영양불균형에 시달리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정부가 오슬로식 식단을 강제로 도입하면서부터는 체중이 전보다 25% 가량 느는 등 건강이 급격하게 좋아졌다. 1950년대 이후로는 각국이 학교 급식을 [[점심]]만 제공하도록 방침을 바꾸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유럽 대륙식 아침 식사 메뉴에 남긴 영향은 아직도 크다. [[https://stmargarets.london/archives/2017/09/the-oslo-breakfast.html|#]][[https://lokalhistoriewiki.no/wiki/Oslofrokosten|#]]] 등의 메뉴를 공공식당에 추가하기도 했다. 이 요리들은 건강에는 좋았지만 육식 위주의 생활을 하던 영국인들에게는 항상 불만거리였고, '대전기 요리'의 전형으로 낙인찍혀 전후에 곧바로 식단에서 퇴출당했다. |||||||| [[파일:1950smenu.jpg|width=100%]] || |||||||| '''일주일 권장 메뉴''' || || || 아침 식사 || 점심 식사[* 디너(Dinner)는 일반적으로는 저녁을 의미하지만, 영국에서는 하루 중 가장 든든하게 챙겨 먹는 점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 저녁 식사 || || 월요일 || 스크램블 에그 || 냉고기 및 샐러드[br]잼 롤리폴리[* 얼핏 [[슈트루델]]과 비슷하게 생긴 영국식 푸딩 또는 [[롤케익]]의 일종. 중간에 잼을 채워 넣었기에 잼 롤리폴리라고 불린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를 즐기는 영국인들은 '''시체의 팔(Dead man's arm)''' 내지는 '''시체의 다리(Dead man's leg)''' 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창백한 원통에 붉고 푸른 잼이 비어져 나오는 꼴이 영락없는 살해당한 사람의 피투성이 팔 같이 생겨서이다. 다만 실제로는 아주 먹음직스럽게 생겼다.[[https://www.google.co.kr/search?q=jam+roly+poly&sca_esv=587485404&tbm=isch&source=lnms&sa=X&ved=2ahUKEwj0uIHZ0_OCAxV3h68BHV_XA-kQ_AUoAXoECAMQAw&biw=592&bih=605&dpr=1.5|이렇게 생겼다.]]] || 웰시 레어빗[* [[웨일스]]식 빵의 일종으로, 치즈를 올려 구운 빵이다.[[https://www.google.co.kr/search?q=welsh+rarebit&sca_esv=587485404&tbm=isch&source=lnms&sa=X&ved=2ahUKEwiFxOO51POCAxWdhq8BHe5wB_oQ_AUoAXoECAIQAw&biw=592&bih=605&dpr=1.5|이렇게 생겼다.]]] || || 화요일 || 베이컨과 토마토 || 속 채워서 구운 해덕대구[br]재킷 포테이토[* 패밀리 레스토랑 등지에서 볼 수 있는, 칼집 내어 구운 감자.][br]콜리플라워[br]사과 파이와 커스터드 || 감자 수프[br]코니시 패스티[* [[콘월]] 지방에서 먹는 파이의 일종.] || || 수요일 || 피시 케이크[* 생선을 이용해 만든 경단을 튀긴 요리. 영락없는 일본 [[생선까스]]나 [[고로케]]처럼 생겼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의 조상에 해당한다.] || 구운 토끼[br]찐 양파[* 원문은 브레이징 한(Braised).][br]구운 감자 슬라이스[br]마카로니 푸딩[* 영국식 푸딩의 일종. 푸딩이라곤 하지만, 영국에서는 미국이나 일본식 젤리 디저트가 아니라 일종의 한끼 식사나 빵을 의미한다. 마카로니, 밀가루, 그리고 체다 치즈를 틀에 넣어 오븐에 구워 만든다. 말로만 들어서는 감이 잘 안 오지만, 얼핏 보면 한국 횟집에서 스끼다시로 자주 나오는 [[맥 앤 치즈]]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생겼다. [[https://www.google.co.kr/search?q=macaroni+pudding&sca_esv=587485404&hl=ko&tbm=isch&source=lnms&sa=X&ved=2ahUKEwjZvPfp1vOCAxUJcfUHHdUZAmQQ_AUoAXoECAIQAw&biw=592&bih=605&dpr=1.5#imgrc=29EB0iGFTCG2pM|이렇게 생겼다.]]][br]과일 스튜[* 과일을 설탕과 함께 푹 끓여 만든 [[디저트]]로, 러시아와 독일의 컴포트(Kompot)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단 과일 건더기가 메인이다.[[https://www.google.co.kr/search?q=stewed+fruit&sca_esv=587489714&hl=ko&tbm=isch&source=lnms&sa=X&ved=2ahUKEwi1hMOg2POCAxXPZvUHHbfrCFEQ_AUoAXoECAIQAw&biw=592&bih=605&dpr=1.5|이렇게 생겼다.]]] || 소금간 한 오믈렛 || || 목요일 || 구운 베이컨과 감자 슬라이스 || 구운 소시지[br]구운 토마토[br]매시드 포테이토[br]채소류[br]팬케이크 || 절인 청어 || || 금요일 || 포리지[br]앤초비 토스트[* 멸치의 일종인 [[앤초비]]를 구운 빵에 올려 먹는 요리. [[https://www.google.co.kr/search?q=anchovy+toast&tbm=isch&ved=2ahUKEwj4n5bt2POCAxXjb_UHHQE8B_kQ2-cCegQIABAA&oq=anchovy+toast&gs_lcp=CgNpbWcQAzIHCAAQgAQQEzIICAAQCBAeEBMyCAgAEAUQHhATOgUIABCABDoICAAQgAQQsQM6BAgAEAM6DggAEIAEEIoFELEDEIMBOgQIABAeULYCWPc6YIc8aAFwAHgCgAGMAYgBghqSAQQxLjI4mAEAoAEBqgELZ3dzLXdpei1pbWewAQDAAQE&sclient=img&ei=tq1sZfjsHOPf1e8PgficyA8&bih=605&biw=592&hl=ko|이렇게 생겼다.]]] || 치즈와 감자 타르트[br]당근이나 채소[br]마멀레이드 푸딩 || 소시지 통조림[* 말 그대로 통조림에 담은 소시지로, 영미권에서는 가장 하급품 육류로 친다.[[https://www.google.co.kr/search?q=tinned+sausage&sca_esv=587489714&hl=ko&tbm=isch&source=lnms&sa=X&ved=2ahUKEwjCqIjg2fOCAxWDVN4KHcj-CGEQ_AUoAXoECAIQAw&biw=592&bih=605&dpr=1.5|이렇게 생겼다.]]][br]샐러드 || || 토요일 || 삶은 달걀 || 멀리가토니(Mulligatawny) 수프[* [[남인도 요리]]로, [[커리]]의 일종이다. 렌틸콩과 양고기 또는 닭고기로 만든다. 영국에서 최초로 유행한 커리 중 하나다.][br]연어 리솔레 통조림[* 리솔레는 남는 빵부스러기들을 모아 굽거나 튀긴 요리를 뜻한다. 범유럽적으로 먹는 [[잔반]] 처리용 음식이다. 연어 리솔레는 여기에 연어살을 섞어넣은 것. 생긴 것은 영락없는 [[동그랑땡]]이나 [[고로케]]다. [[https://www.google.co.kr/search?q=salmon+rissole&tbm=isch&ved=2ahUKEwig_sLU2_OCAxVYuVYBHbgxBpkQ2-cCegQIABAA&oq=salmon+rissole&gs_lcp=CgNpbWcQAzIHCAAQgAQQE1CRA1iQGWDTGmgAcAB4AIABjQGIAdEIkgEDMC45mAEAoAEBqgELZ3dzLXdpei1pbWfAAQE&sclient=img&ei=qLBsZaCKBdjy2roPuOOYyAk&bih=605&biw=592&hl=ko|이렇게 생겼다.]] 통조림 리솔레의 사진을 구할 수 없어 일반적인 리솔레로 대체한다.][br]크림 루타바가와 당근[* 크림 당근은 말 그대로 크림 넣은 [[루]]로 볶아낸 당근이다. [[https://www.google.co.kr/search?q=creamed+carrots&tbm=isch&ved=2ahUKEwjhs46A3POCAxUTU94KHXvcDjAQ2-cCegQIABAA&oq=creamed+carr&gs_lcp=CgNpbWcQARgAMgcIABCABBATOgUIABCABDoOCAAQgAQQigUQsQMQgwE6CAgAEIAEELEDOgQIABADOgQIABAeOggIABAIEB4QEzoICAAQBRAeEBNQ6AFY3jBglThoAXAAeAKAAYcBiAGhGJIBBDQuMjSYAQCgAQGqAQtnd3Mtd2l6LWltZ7ABAMABAQ&sclient=img&ei=A7FsZaGmHpOm-Qb7uLuAAw&bih=605&biw=592&hl=ko|이렇게 생겼다.]] 그리고 [[루타바가]]는 [[순무]]와 비슷한 채소의 일종이며 하급 구황작물로 쓰인다. 다만 북유럽에서는 기후 문제로 인해 자주 먹는다. 스웨덴 순무라고도 한다. ][br]매시드 포테이토[br]빵과 버터 푸딩[* 남은 빵과 버터를 이용해 만든 [[푸딩]]으로, 역시 잔반처리용 음식이다. 많은 영국인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식이기도 하다. [[https://www.google.co.kr/search?q=bread+and+butter+pudding&sca_esv=587489714&hl=ko&tbm=isch&source=lnms&sa=X&ved=2ahUKEwjH1rPy3POCAxXEbfUHHZZFC5QQ_AUoAXoECAQQAw&biw=592&bih=605&dpr=1.5|이렇게 생겼다.]]] || 생선구이와 감자칩[* 감자칩은 영국에서 개발된 요리이다. 오늘날에는 과자로 먹지만 원래는 요리였다.] || || 일요일 || 키퍼[* 내장을 손질하고 반 갈라 염장한 후 훈제한 [[청어]]. 버터를 발라 구운 후 스크램블 에그, 토스트와 함께 먹는다.] || 로스트 디너[br]구운 감자[br]채소[br]요크셔 푸딩[br]과일 파이와 커스터드[* 메뉴를 보면 알겠지만 그냥 [[로스트 디너]] 메뉴다. 과일 파이와 커스터드는 영국인들이 자주 먹는 디저트다.] || 콜리플라워 그라탕[* 콜리플라워로 만든 [[그라탕]]. [[프랑스 요리]]다.] || |||||||| 참고: 홍차나 커피는 아침에 내십시오. 원한다면 아침에 토스트나 빵 그리고 시리얼도 같이 드십시오. || ▲ 1951년에 출판된 영국의 한 요리책에서 권장하는 일주일 식단.[[https://www.historic-uk.com/CultureUK/Food-in-Britain-in-the-1950s-1960s/|#]] 이렇게 먹을 수 있고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식자재들을 가릴 것 없이 최대한 활용하려던 노력 덕분에 영국인들의 영양 상태는 전쟁 전보다 오히려 더 좋아졌다. 그리고 배급제 덕에 영국인들은 타 문화권의 요리를 접할 수도 있었다. 자주 볼 수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공공식당에서는 인도 등 식민지와 미국에서 들여온 [[커리]], [[볼로네제 소스|볼로녜제]] [[스파게티]] 등의 외국 요리들이나 [[스코틀랜드]]의 [[해기스]] 같은 타 지역 요리들도 들어오는 대로 적극적으로 선보였다. 특히 미국산 '''[[스팸]]'''의 영향은 너무도 커서 전후에 [[스팸메일]]이라는 표현이 새로 등장할 정도였다. 전쟁 전에는 외국 요리를 딱히 접할 기회가 없던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이때 공공식당에서 식사하며 처음 외국 요리들을 접했다. [[6.25 전쟁]] 당시 한국인들이 미국의 원조물자로 [[햄]]이나 [[소시지]] 등의 서양 요리를 처음 접했던 것이나 [[부산광역시|부산]], [[울산광역시|울산]], [[창원시|창원]], [[거제시|거제]] 등 [[경상남도|경남]] 동부 지역이나 강원도 영동 지역에서도 [[함경도]] 출신 [[실향민]]들이 가져온 [[함흥냉면]]을 먹을 수 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정부의 이런 방침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언제 독일의 [[폭격]]으로 비명횡사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항상 시달리던 대다수 영국 국민들은 정부가 반강제로 들이미는 낮선 음식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피시 앤드 칩스]], 뱅어즈 앤 매시 등의 익숙한 요리들을 먹고 싶어했다. 이 요리들은 정부가 도입한 식단들에 비해 영양가는 한없이 낮았지만, 시민들의 든든한 '컴포트 푸드(Comfort food)'였다. 익숙한 맛은 전쟁에 시달리는 시민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되찾아 주었다. 전시 상황에서 육체적 건강 외에도 정신적인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생각해보면 이 요리들이 시민들에게 미친 영향은 꽤 긍정적이었다. 이 정도의 자그마한 반발이나 일부 약탈자들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영국인들은 정부의 배급 제도를 아주 잘 따라 주었다. 이 배급 제도는 영국인들이 생필품 부족에도 불구하고 [[기근|기아]]에 시달리지 않고 계속 싸울 수 있게 해 준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윈저 왕조|왕실]][* 당시 공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도 결혼을 앞두고 [[웨딩드레스|드레스]]를 구하기 위해 자신에게 할당된 배급 쿠폰을 모아야 했다. 물론 왕실에 대한 배급은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의 속성을 강하게 띄었다.[[https://britishheritage.com/queen-wedding-dress-wwii-ration-coupons|#]]]까지 대상으로 했던 이 배급 정책과 [[랜드리스|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영국은 나치 독일을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당대의 영국인들은 독일의 식민지로 전락한 여타 유럽 국가들이나 주요 [[곡창지대]]를 전부 상실한 소련, 그리고 연합국 폭격의 대상이 되어 갈수록 피폐해지던 [[독일인]][* 단, 독일인들은 1943년까지는 여타 유럽 점령지들과 동맹 국가들을 아주 가혹하게 착취하며 전쟁 이전과 같은 생활을 영위했다. 독일인들이 기근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은 전쟁 후반 연합군이 독일 점령지들을 탈환하여 착취할 대상이 사라진 이후부터다. 그리고 곧 이어진 연합국 점령기에 미국에서 대량의 원조 물자가 들어오면서부터 독일은 전쟁 이전의 삶을 곧 복구했다.]들보다는 분명 잘 먹었다. 대전 이후에도 배급 제도가 9년이나 더 이어진 가장 큰 이유는, 우선적으로는 식량 생산 문제가 전후에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높은 위도[* 잘 체감하지 못하는 사실인데, 영국 본토 대부분 지역은 [[북유럽]]인 [[덴마크]]와 [[스웨덴]], 그리고 [[노르웨이]] 남해안과 동위도에 있을 정도로 고위도에 있다. 때문에 [[아일랜드]]를 제외한 [[서유럽]] 국가인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모나코]]보다 위도가 더 높다. 그래서 서유럽 국가 치고는 고위도인 독일에서도 가능한 [[포도주/독일|와인]] 생산이 영국에서 [[포도주|와인]] 생산이 거의 불가능한 거다.]와 [[서안 해양성 기후]]로 인해 빵은 1948년까지 배급되었으며 감자 역시 종종 공급 부족 현상을 겪어야 했다. [[홍차]]는 1952년, [[치즈]]와 [[설탕]]은 1953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색육은 배급제가 끝나는 1954년에야 배급 대상에서 지정 해제되었다.[[https://museum.wales/articles/2166/Food-Rationing-during-the-Second-World-War/|#]] 경제적으로도 전후 영국은 사정이 매우 좋지 못했다. 물론 외교적으로는 서방 연합국의 2인자이자 2차 대전의 [[상임이사국|5대 승전국]] 중 하나로서 최고의 영예를 목에 걸었으나, 세계대전을 겪으며 국력을 소모한 [[영국]]의 [[영국/경제|경제적 상황]]은 그 위상을 소화해내지 못했다. 우선 영국은 미국 [[무기대여법]]의 최대 수혜자로써 어마어마한 채무를 갚아야 했다. 동시에 연합국으로써 영국이 해방한 유럽 및 아시아 지역들과 [[연합군 점령하 독일|독일 점령 지역]]에 있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에게도 식량 지원을 해야 했다. [[동아시아]]에서 [[6.25 전쟁]]이 터지자 다시 한 번 수만 명의 [[주한영연방군|원정군]]을 [[대한민국|한국]]에 파견했고, 아시아 식민지 곳곳에서 벌어지는 소요 사태를 진정시키고 [[패권주의|패권국]]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영국령 홍콩|홍콩]]과 [[싱가포르]]에 있는 [[해외 주둔 영국군|주둔군]]의 전력을 보강해야만 했다. 이 와중에도 전처럼 거대한 [[대영제국|식민제국령]]의 수억 인구를 부양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대전 전후의 영국은 제 코가 석 자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맞먹는 수준의 [[초강대국]]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딜레마를 맞이했다. 물론 전처럼 식민지들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이런 상황을 타개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쟁 이전이라면 모를까 자유와 인권 보장에 대한 인식, 그리고 대영제국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조해 주었던 식민지 주민들의 정치적 위상이 대폭 상향된 전후 세계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논리였다. 폭압적인 [[추축국]]으로부터 세계를 해방하며 새로운 전후 질서를 열어젖힌 장본인 중 하나라는 영국이 착취라는 시대 역행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히틀러를 쓰러뜨렸다는 자부심에 물든 영국인들 스스로도, 그리고 국제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현실적으로도, 그러한 선택으로 인해 격렬하게 벌어질 탈식민주의 운동을 일일히 진압할 정도로 여력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바로 옆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옛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 다시 쳐들어갔다가 국제적으로 고립당하고 끝내 쫒겨나는 모습은 이러한 믿음을 강화했다. 영국은 곧 자국의 현실을 인정하고 [[미국]] 주도의 서방 국제 질서에 편승하는 대신 2인자의 [[영국/외교|위치]]를 확보했으며, 1960년대까지 기존의 제국 체제를 [[영연방]]의 형태로 정리하며 [[식민지]]들을 차차 독립시키기에 이른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영국 정부는 경제 상황이 어느 정도 정상 궤도에 오르기까지 민생 안정을 위해 배급제를 유지해야만 했다.[* 물론 [[동아시아]]에서 [[주한영연방군]] 등 파병 부대를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싱가포르]] 주둔군 부대는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본격적인 침략을 당하지는 않았던 영국이 추축국의 점령지이자 육상 전장으로 변해버린 여타 유럽 국가들보다도 오래 배급제를 유지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간에는 영국 요리를 두고 '영국이 전 세계를 경영하느라 요리에는 미처 신경을 못 썼다'는 식의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결과적으로 1940 ~ 50년대 한정으로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인 셈이다. 하지만 이는 전시 정책이나 영양학적 측면에서의 평가고, 요리 문화의 차원에서 보자면 15년간이나 이어진 배급은 더도 덜도 말고 '''그냥 [[재앙]]이었다.''' 현대 영국의 [[요리사]]들과 전문가들은 영국 요리에 치명타를 날린 사건으로 2차 대전과 배급제를 이구동성으로 꼽는다. 승리를 위해서는 빠르고 확실하게 배를 채워야 했고, 정부는 국민 건강을 위해 영양 균형을 강제적으로라도 맞추고자 했다. 당연히 [[맛]]은 뒷전이 되었다. 대전 이전에 자유 무역과 식민지를 통해 들어오던 향신료와 식재료들은 전쟁으로 거의 증발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재료들만으로 요리를 하게 되면서 영국의 요리들은 정말 극도로 단순해졌다. 한편 배급품에 의존하며 총력전 하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일반 가정에서는 요리를 하기보다는 빠르게 먹고 나갈 수 있는 [[통조림]] 등의 [[보존식품]]들이나 간편식을 선호했다. 배급제가 끝난 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났으니 공공식당 제도는 유지될 필요가 없었고, 맛없는 배급 식품들과 채소 식단들은 사람들의 식탁에서 빠르게 퇴출되었다. 이로써 정부가 우격다짐으로 도입하여 그나마 영국인들의 영양 균형을 맞춰주던 요소들마저 다시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영국의 미식 문화는 초토화되고 영양 상태는 다시 불균형해졌다. 따지고 보면 20세기 중후반의 [[한국 요리]]가 [[6.25 전쟁]]과 전후 복구 시기를 거치며 급격하게 쇠퇴하다 [[대한민국/경제|경제]]의 [[한강의 기적|급성장]]이 본격화된 1980년대 이후에야 서서히 복구되었듯이, 영국 요리도 같은 시기에 비슷한 운명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 따뜻한 기후적 조건과 늦은 [[한강의 기적|산업화]]로 인해 다양한 요리와 가족적 식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한국은 나름 빠르게 식문화를 복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일과 채소를 키우기 힘든 [[서안 해양성 기후]]에 기반한데다 오래 전부터 산업화를 완료했던 영국은 한번 파괴된 식문화를 복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2010년대]]에 [[선진국/대한민국|선진국]]이 된 [[대한민국|한국]]과 달리 [[영국]]은 이미 [[선진국]]이라서 미식 문화 복귀가 더 쉬워 보였지만 자연 환경의 차이가 역설적인 결과를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